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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 변호사 프로필 나이

노영희 변호사 프로필 나이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반대

13일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있는 노영희 변호사가 한 방송에서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 우리 민족인 북한을 향해 총을 쐈다.현충원에 묻히면 안 된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6‧25 전쟁 영웅이지만 일제시대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친일 행적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10일 별세 후 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정치권에서 논란이 있었다.


이날  MBN 뉴스와이드에선 백 장군이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한 부분이 소개됐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강점기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독립군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한 부대다. 당시 항일 독립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지자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을 주도했고 대부분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탄압은 물론 민간인 학살과 약탈, 고문, 강간으로 악명이 높고 활동이 특히 악랄해 소속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국에서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탓에 일본군 ・ 만주군 출신 군인들이 그대로 군국지도부가 되었고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빨치산 토벌에 많은 역할을 했다.


이에 패널로 출연한 노영희 변호사는 방송에서 이해가 안 된다. 저분이 6‧25 전쟁에서 우리 민족인 북한을 향해 총을 쏘아서 이긴 그 공로가 인정된다 해서 현충원에 묻히냐, 저는 현실적으로 친일파가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면서 대전 현충원에도 사실 묻히면 안 된다고 본다고 발언했다.

그러자 진행자가 말씀 중에 우리 민족을 향해서 총을 쏘았던 6‧25 전쟁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수정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노영희 변호사는 6‧25 전쟁은 북한과 싸운 거 아닌가 라면서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은 기사 제목에 노변호사의 친일언급문제는 빼고 6.25 당시 우리민족북한에게 총을 쏜 백선엽 현충원에 묻히면 안되라며 보도했다.


이에 노 변호사가 '우리 민족에게 총을 쏜 백선엽을 어떻게 현충원에 안장시키느냐'는 발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져나갔고 일부 보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그럼 현충원에 묻힌 6·25참전용사들은 모두 민족 반역자이냐" 등의 비판의 소리가 나왔다.

 

이후 노 변호사는 "오해가 있으실까봐 정리를 하면 6·25 전쟁에서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과거에 친일 행적이 미화되거나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묻히거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게 제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다"고 정정했다.


한편 노영희는 1968년 출생으로 올해나이 53세 이다.대원외국어고등학교/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 학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인지심리학 석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인지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했다.


법무법인 천일 변호사. 종편 등 각종 방송에 법률 전문가로 출연하고 있다. 영재교육학교 강사를 하다가 남편 회사를 따라 신림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고시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2019년 6월부터 TBS 뉴스공장 외전 '더룸'을 박지훈(변호사), 이상미와 함께 공동진행하고 있다.또한 2019년 7월 22일부터 YTN라디오 평일 7:00~9:00에 진행하는 출발새아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9년 11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손흥민 태클에 부상당한 안드레 고메즈를 평소 손흥민을 공격하고 인종차별 발언을 하던 선수라고 말해 논란이되었다.

한편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해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백씨는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조만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당시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1953년 박정희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백선엽은 강행했다.



백선엽은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이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 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 대장 자리에 올랐다.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7대)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대)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대)에 부임했다.이후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했다.


한편 백선엽은 부동산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으기도 했다.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강남역 5번 출구 앞의 덕흥빌딩이 있다. 이 건물은 땅값만 공시지가 기준으로 350억원이 넘고, 건물 전체 시세는 최소 2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태원의 자택만 해도 시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